[한경에세이] 회색, 이영희의 색

입력 2016-01-19 17:57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 >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꽃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내게 회색이란 색깔은 그런 시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 있는 색깔이다. 사실 내가 한복계에 처음 입문한 당시 회색은 한복에 쓰이는 빛깔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신라호텔에서 연 내 첫 번째 개인 쇼(1981년)에서부터 회색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 회색을 한복에 사용하고 있다. 그저 사용할 뿐만 아니라 회색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색, 내가 감히 ‘이영희의 색’이라고 부르는 색깔이다.

회색은 신비로운 색깔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세상의 어떤 것을 태워도 결국은 모두 회색이 되고 만다. 이를 보더라도 회색은 세상 만물의 기원이자 그 궁극의 색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회색은 화합과 융화의 색이다. 그렇기에 회색은 어떤 색과도 다 잘 어울린다. 치마를 회색으로 하면 그 위에 어떤 색깔의 저고리를 배색해도 안 어울리는 색이 없다.

내가 회색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열 살 무렵이었다. 거의 해마다 여름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화사에 가고는 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글씨를 쓰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먹을 갈거나 아버지가 글씨를 쓰시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절에서의 풍경들이 아직 기억에 선하다.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마주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스님들의 모습. 아버지의 글씨에서 배어나던 먹물의 향기. 오래된 옛 절의 기와 빛깔. 그런 감각들이 내게 회색이라는 색에 대한 원초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준 것 같다.

처음부터 회색이 그렇게 다른 색과 조화를 잘 이룰 것이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 알고서 한 일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일어난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나는 결과를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그저 그 순간 내가 좋아서 미친 듯이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면 내가 전혀 생각도 못한 결과들이 일어났고,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 중에는 성공적인 것이 많았다.

회색의 발견 역시 내가 처음부터 어렸을 때의 그 먹물 색과 절의 빛깔을 기억해냈기 때문이 아니다. 회색으로 자꾸 이런저런 옷을 짓다 보니 어렸을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아, 내 안에 이런 기억들이 숨어 있어서 어딘가에서 영향을 미치는구나’라고 깨닫게 됐을 뿐이다. 그 깊은 회색의 느낌. 먹물의 깊이와 향기,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그 영원성이 색깔로 표현된 셈이라고나 할까.

내가 회색을 디자이너 이영희의 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이 색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를 닮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 >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슈퍼개미]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